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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 화조영모도 10폭 병풍 | 10800000 (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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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화조영모도 10폭 병풍입니다
1892년 임진년 31살때 청국으로 건너가 상해 유람하던시절 작품입니다
華山侍郞大人 雅正 화산시랑대인 아정 ~내생 安旭祥 안욱상
본작품은 중국 화산시랑대인이라는 사람에게 선물로 준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아정은 누구에게 작품을 바칠 때 이름 아래에 상투적으로 쓰는 말 중 하나입니다)
본작품은 안중식 스승인 장승업의 화풍이 남아있는 초기작품으로서 귀합니다
안중식의 초명 욱상으로 초기작품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병풍폭당크기: 42 x 180 cm
그림만크기: 30 x 125 cm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은 철종 12년(1861) 8월 28일에 순흥 안씨(順興安氏)인 안홍술(安鴻述)과 밀양 주씨(朱氏) 사이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종식(鍾植), 별명은 욱상(昱相), 욱상(旭祥), 자는 공립(公立), 호는 심전(心田), 만년(晩年)의 호는 부불옹(不不翁)이라 하였다. 그의 가정 형편은 중류 이상으로 생활의 여유가 있었으나 12세 때(1873)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참고자료)
개항에 뒤따른 일련의 조치들은 확실히 획기적인 이변이 아닐 수 없다.
1880년대의 바람, 개화파들은 과학기술 등 선진문물을 도입키 위해 해외 유학의 장려를 종용했다.
1881년 고종의 적극적인 배려 아래 중국으로 떠난 영선사 일행, 이는 일본을 다녀온 신사유람단과 함께 커다란 글씨로 기록되는 한국 근대사의 일대사건이기도 하다.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등 새로운 기술의 습득을 위한 영선사 일행에게 주어진 사명은 실로 막중했다. 화약제조 등 11가지 과목으로 분류, 학도(20명)와 공장(18명)으로 나뉜 38명의 유학생이 그들이다.
영선사 유학생은 천진기기국에서 불과 1년여 밖에 수학하지 못했다. (실제 학습기간은 반년), 이듬해 일어난 임오군란 등 국내정세의 급변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영선사는 자주적인 시작으로 근대화를 실현시키려는 커다란 의지를 갖게 했다.
이렇듯 근대화라는 역사상의 일대 사건에 화가도 동승했다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갖가지의 과목 속에는 「제창기기(諸廠機器)의 제도법」을 학습 내용으로 하는 화도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그 기계제도의 임무를 띠고 영선사의 유학생으로 선출된 학도는 조태원과 안욱상이다.
곧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의 초명을 가리킨다.
이들이야말로 변혁기에 살면서 서화계를 지킨 마지막 거인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곧 우리나라 화단사와 호흡을 함께한 왕조시대 말기의 척도가 된다. 소림과 심전, 이들은 침몰되는 「조선」이라는 배를 타고 온갖 비애를 함께 나눈 최후의 쌍벽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서화계의 종착지를 대표하는 반면 새 시대를 이끌 신예들의 선도 역할을 지녀야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침몰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나라의 운명으로나 시대미감으로나 같은 의미를 갖게 했다. 이를 입증하듯이 소림과 심전은 온갖 어려움 끝에 단행된 영선사의 중국행 일행으로 선발되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40년가량을 교류하며 이 나라 화단의 어른으로서 근대미술 제 1세대들을 양성케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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